자동차 브랜드는 새 모델을 먹고 산다’는 업계의 격언이 있다. 그만큼 새 모델이 판매 증대에 가장 중요한 수단이라는 뜻이다. 그런데 요즘 독일 프리미엄 3사는 조금 특이한 신모델, 또는 콘셉트 모델을 선보이고 있다. 새로운 최상위 모델, ‘플래그십(기함)’이 그 대상이다. 메르세데스 벤츠가 S 600 L을 바탕으로 마이바흐 브랜드를 재활용해 메르세데스 마이바흐 S 클래스를 출시했고, BMW는 복합 소재 등 첨단 기술을 대폭 적용한 미래형 리무진 비전 퓨처 럭셔리 콘셉트를, 아우디는 최고급 스포츠 쿠페인 프롤로그 콘셉트를 선보였다.
 

여기서 하나 의문이 든다. 새로운 기함급 모델을 론칭하는 건 모험이기 때문이다. 자칫하다간 얻는 것보다 잃는 것이 많을 수 있다. 왜냐고? 첫째, 개발비에 비해 판매량이 매우 적어 수지 타산이 맞지 않는 경우가 대부분이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메르세데스 벤츠는 2013년 전체 판매량인 147만대 가운데 기함급인 S, SL, CL, SLS, 마이바흐 등을 모두 합친 판매량이 7만1000대 수준이었다. 이건 전체 판매량의 5퍼센트에 불과하다. BMW는 사정이 더욱 좋지 않다. 전체 판매량 165만대 가운데 7시리즈가 5만6000대(3.4퍼센트)에 불과했다. 물론 대당 마진은 하위 모델들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많을 것이고, 다른 모델과 개발비를 공동 부담하는 등의 간접적인 방법으로 비용을 분산할 수도 있겠지만 환경 문제 등으로 대형차 판매가 위축되는 세계적인 트렌드를 감안할 때 결코 미래가 밝지는 않다.
 

두 번째 이유는 이들에게는 A8, 7시리즈, S 클래스 등의 기함이 이미 존재한다는 점이다. 없던 기함을 만드는 것만큼 브랜드 이미지에 효과적이지도 않을 것이고, 지금까지 엄청난 시간과 노력, 비용을 투입해 겨우 자리 잡은 기존 기함의 위상이 최소한 부분적으로라도 손상을 입을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새로운 기함에 더욱 특별한 고객 관리와 서비스 프로그램을 제공할 수밖에 없는데 이러면 기존 기함의 고객들은 배신감을 느끼며 브랜드에 대한 충성심을 버릴 우려도 있다. 새로운 기함을 시도했다가 실패할 경우에는 상처 입은 기존의 기함밖에 남지 않는 최악의 상황도 충분히 예상할 수 있다.
 

이런 위험을 감수하면서까지 새로운 기함을 출시하거나 타진한다면 거기엔 절박한 이유가 있다는 뜻이다. 그것이 뭘까? 가장 직접적인 이유는 21세기 들어 전개된 판매량 경쟁이다. 2000년 아우디는 판매량이 65만대, BMW는 82만대, 메르세데스 벤츠는 105만대 수준이었다. 그런데 2013년에 아우디는 158만대, BMW는 165만대, 메르세데스 벤츠는 157만대가 됐다. 250만대 규모에서 480만대 수준으로 거의 두 배로 성장한 것이다. 중국의 경제성장과 같은 긍정적인 부분도 있었지만 반대로 고급-대형차 시장이 위축되고 있는 선진국에서 독일 3사는 지금까지 진출하지 않았던 시장을 모두 공략해야 했다. 첫째는 소형차 시장이며, 둘째는 각종 크로스오버의 틈새시장이다. 크로스오버 시장은 규모 자체에 한계가 있으므로 다양한 접근을 시도하는 것이었지만 상대적으로 넓은 소형차 시장은 숫자를 늘리기에 가장 매력적인 시장이다. 2000년 당시에는 벤츠 A 클래스만이 의미 있는 판매량(20만대)을 기록하고 있었고 BMW는 전무했으며, 아우디는 양산차라고 보기 힘든 100퍼센트 알루미늄제 A2를 브랜드 홍보용으로 판매하고 있었다(3만대). 그런데 2013년에 같은 세그먼트에서 벤츠가 38만대, BMW가 21만대, 아우디가 50만대 이상으로 다섯 배 이상 성장했다.이 과정에서 회사는 커졌지만 브랜드는 상처를 입었다. 프리미엄 제품의 생명 가운데 하나인 희소성에 상처를 입은 것이다. 소형차의 비중이 늘어난 만큼 상대적으로 고객의 평균 구매력 수준도 낮아졌다. 여기에 과도한 판촉 경쟁 결과 음성적으로 가격을 할인하는 일도 생겨 제품의 시장 가치는 더욱 추락했다. 이전에는 고객이 그렇게 많지 않아 어렵지 않게 제공할 수 있었던 1대1 맞춤 서비스 등을 물리적으로 더 이상 제공할 수 없거나 선별적으로 제공해야 하는 상황에 맞닥뜨리게 됐다. 이제는 선택된 사람들을 위한 프리미엄 브랜드일 수가 없게 됐다. 기존의 충성도 높은 고객들에게서 ‘브랜드가 싸구려가 됐다’는 불평이 나올 만한 상황이 된 것이다.
 

브랜드 가치의 하락은 프리미엄 브랜드에게는 매우 치명적일 수 있다. 이들에게 브랜드 가치는 부가가치, 즉 수익성과 직결되기 때문이다. 대중적인 브랜드와 차이를 별로 느낄 수 없다면 고객들은 더 이상 높은 비용을 지불하고 프리미엄 브랜드의 제품을 구입하지 않을 것이다. 그래서 이들은 자신들의 브랜드 가치를 끌어올릴 방법을 모색했다. 충성도 높은 고객의 불만을 해소하기 위해 고객 관리 프로그램을 강화하고, 상위 모델 고객에게는 보다 차별화된 서비스를 제공해 마음을 어루만졌다. 다양한 브랜드 관련 캠페인이나 행사를 통해 브랜드 충성도도 끌어올렸다. 하지만 가장 중요한, 제품 라인업의 하향 평준화를 해소하지 못한다면 문제의 원천은 그대로 남게 된다. 그래서 등장한 것이 새로운 기함의 추가다. 소형 엔트리 모델이 늘어나서 모델 라인업의 평균이 낮아졌다면 상위 모델을 추가해 균형을 맞추겠다는 거다. 하지만 이미지는 판매량과 직결되는 것이 아니므로 굳이 많이 팔진 않아도 된다.
 

새로운 기함의 선정 조건은 꽤 까다롭다. 우선 BMW와 롤스로이스의 관계나 아우디와 벤틀리의 관계처럼 독자적인 이미지가 지나치게 강한 브랜드는 도움이 되지 않는다. 롤스로이스의 기함을 아무도 BMW의 기함이라고 생각하지 않기 때문이다. 둘째, 브랜드의 역사에서 연결고리를 찾기 쉬워야만 이미지 향상에 도움이 된다. 셋째, 현재 브랜드 이미지의 연장선에 있어야 고객들이 이해하기 쉽다. 넷째, 현재 브랜드 이미지에서 부족한 부분을 채울 수 있도록 섬세하게 캐릭터와 위치를 잡아야 한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이미 개발이 끝났거나 적은 비용으로 개발할 수 있는 기술, 또는 앞으로 다른 모델에도 적용할 기술을 최대한 공유해 개발 비용을 최소화해야 한다.
 

이 같은 관점에서 세심하게 선정한 기함이 앞서 소개한 3사의 새로운 기함이다. 메르세데스 마이바흐 S 클래스는 쇼퍼 드리븐 리무진이다. 벤츠는 이미 S 클래스 쿠페를 갖고 있기 때문에 더 특별한 모델은 필요치 않다. S 클래스를 필두로 경쟁자와 차별화된 프리미엄 이미지를 강화할 수 있는 최고의 리무진을 갖는 것이 더 중요하다. 이 새로운 기함은 S 600을 기반으로 하기 때문에 기술이나 개발 비용에서 무리가 없다. 비록 한 번 실패했지만 독자적인 브랜드로 키우지 않을 계획이라면 마이바흐라는 브랜드는 충분히 활용 가치가 있다. 브랜드를 초호화 브랜드로 격상할 계획에 따라 앞으로 벤츠는 최고의 리무진을 상징하는 ‘풀만(Pullmann)’ 라인이나 초호화 컨버터블을 추가할 예정이라고 한다.
 

BMW는 첨단 기술을 최초로 적용하는 것을 좋아한다. i3와 i8에 복합 소재를 대폭 사용했다고 자랑하기도 했다. 그러니까 벤츠에 비해 다분히 공격적인 이미지를 지닌다. 하지만 현재의 7시리즈가 상대적으로 약한 이미지를 갖고 있다는 점이 아쉬웠다. 그래서 이번에 선보인 비전 퓨처 럭셔리 콘셉트는 다양한 첨단 기술을 적용한 최첨단 리무진이라는 점을 강조한다. 이 모델이 실제로 9 시리즈라는 새로운 기함의 베이스가 될지, 아니면 기존 기함인 7시리즈의 이미지를 크게 강화하기 위한 사전 홍보용 모델의 성격을 가질지는 현재로서는 불확실하다. 하지만 확실한 건 BMW는 여전히 첨단 기술에 관한 한 가장 앞선 브랜드이며, 보수적이기 쉬운 기함조차 최첨단 기술을 적극 탑재하는 진취적인 브랜드라는 이미지를 전달하기에는 충분하다.
 

아우디는 지난 20년 동안 가장 급격하게 질적, 양적으로 성장한 브랜드다. 그러다 보니 요즘 들어서 모델이 매우 뛰어난 디자인과 품질을 자랑하기는 하지만 이전보다 공격적이지 않을뿐더러 아우디만의 ‘인텔리전트’한 개성이 희석되는 등 보수화되고 있다는 평가를 듣기도 한다. 게다가 아우디는 더 이상 폭스바겐 그룹의 최고급 브랜드가 아니다. 벤틀리, 부가티, 람보르기니, 포르쉐가 폭스바겐 그룹의 가족이 된 것이다. 따라서 아우디는 보다 특별한 모델을 통해 브랜드 정체성과 이미지를 끌어올릴 필요가 절실해졌다. 그래서 선택한 것이 럭셔리 2도어 쿠페 디자인의 ‘프롤로그 콘셉트’다. 이 모델은 앞으로 A9으로 아우디의 이미지 리더가 될 것이라는 소식이다.
 

‘플래그십’이라는 단어에는 복합적인 의미가 있다. 그 옛날 바다에서 전투를 치를 때도 기함의 역할은 단순히 큰 대포로 적함을 공격하는 것에만 그치지 않았다. 기함이 존재한다는 것만으로도 적군의 사기를 꺾고 아군의 사기를 드높일 수 있는 심리전의 총아였다. 이런 측면에서 독일 프리미엄 3사가 펼칠 ‘신(新)기함 전쟁’의 판도가 매우 흥미롭다. 참고로 바다는 넓지 않다.
 

글•나윤석(자동차 컬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