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이미 높은 자의 젊은 처방
“앞으로 7년 동안 3개월마다 저렴한 신차를 출시하겠습니다.” 특히 저렴한(cheap)이란 단어를 힘주어 말했다. 한 글로벌 자동차 업체의 미국 CEO가 2013년 CNBC 인터뷰를 통해 밝힌 내용이다. 대부분의 업체들은 ‘좀 더 고급스럽게’ ‘좀 더 세련되게’ 브랜드를 포장하려고 한다. 하지만 이 업체는 그럴 필요가 없다. 이미 하이엔드이기 때문이다.
세계적인 명차, 세계 최초의 자동차를 만든 회사. 웅장한 느낌이지만 어딘가 올드하다. 메르세데스 벤츠 얘기다. 어느 순간부턴가 벤츠는 중장년층에게 어울리는 비싼 차라는 인식이 강해졌다. 덕분에 2005년 BMW에 프리미엄 자동차 브랜드 1위 자리를 내준 뒤 2011년 아우디에게마저 밀려 글로벌 판매 순위 3위로 주저앉았다. 2013년 BMW의 글로벌 판매는 166만대, 아우디는 158만대, 메르세데스 벤츠는 146만대다. 2011년부터 3사의 팽팽한 구도는 지속 중이다.
하지만 최근 들어 벤츠가 변하고 있다. 디자인이 젊어지고 있는 것이다. B 클래스 이후에 A 클래스, CLA, GLA 등 다양한 콤팩트 라인업을 내놓고 있다. 명품업체들이 고급 가방에만 주력하다 좀 더 저렴한 라인부터 액세서리까지 엔트리 모델을 만들어내는 것과 동일한 전략이다. 아무래도 범접할 수 없는 브랜드로만 포지셔닝되면 매출 성장의 동력을 잃기 때문이다. 비교적 구매력이 낮은 소비자들에게 브랜드를 친숙하게 알리며 이들이 추후 경제력을 갖출 땐 고가의 라인을 구매할 수 있도록 로열티를 만드는 것이다.
전략의 방향성만 가졌다고 모든 문제가 해결되는 것은 아니다. 결국 자동차는 성능과 디자인이다. 메르세데스 벤츠의 모회사 다임러는 젊고 세련된 디자인에서 문제 해결의 실마리를 찾았다. 이 어려운 임무를 맡은 사람은 30대의 젊은 디자이너, 고든 바그너였다.
고든 바그너는 1997년 벤츠에 입사해 11년 만인 2008년 수석 디자이너 자리에 올랐다. 그의 나이 39세였다. 다임러 제체 회장의 파격 인사였고 결과는 성공적이었다. 아버지 세대에서 아들 세대로 고객층이 이동함에 따라 디자인도 20년 젊게 만들어야 했다. 그것이 바그너의 임무였다. 그는 수석 디자이너로 부임해 5년 동안 소형 해치백인 A 클래스부터 대형 세단 S 클래스까지 전 차종에 새 옷을 입혔다. 소비자들은 벤츠의 새로운 모습을 반겼다. 고성능 브랜드인 AMG의 판매량도 함께 늘었다.
2013년 미국에서 벤츠 CLA가 출시되자마자 첫 주에 2300대를 팔아치웠다. 2만9900달러라는 저렴한 가격과 매력적인 디자인이 소비자들에게 어필했다. 덕분에 미국 시장에서 럭셔리 브랜드 중 판매 1위를 기록했다. 국내에서도 마찬가지다. 드라마 <별에서 온 그대>에서 주인공 김수현이 몰았던 CLA 45 AMG의 덕도 있겠지만, 젊고 세련된 신차들의 판매 호조로 벤츠는 지난 9월 33개월 만에 BMW를 제치고 판매 1위를 기록했다. ‘별그대’ PPL 덕에 중국에서도 벤츠 판매가 호조를 보여 벤츠차이나에선 벤츠코리아에 감사편지까지 전했다고 한다. 프리미엄 브랜드들의 매스마켓 침투로 매스 브랜드들은 더 열심히 뛰어야 할 처지가 됐다. 벤츠의 콤팩트 라인업 구축은 국내 자동차 업체들이 더 많은 차별적 시도를 구사해야 하는 이유가 됐다.

2 Best or Nothing
벤츠라는 브랜드를 이야기할 때 자동차 스펙이 좋고 나쁘고는 중요하지 않다. 그저 벤츠라는 것이 중요하다. 어릴 적 “너네 집 차 벤츠라며?”라는 질문에 답하는 아이는 자신감이 넘쳤고 그 누구 하나 다른 질문을 던지지 않았다. 벤츠는 특별했고, 벤츠의 엠블럼을 달고 있으면 크기 또한 문제가 되지 않았다.
그런 벤츠가 우리나라에서 한동안 부진했다. 세계 자동차 브랜드 역사의 시작이라고 할 수 있는 벤츠가 오랫동안 국내 수입차 시장을 이끌어오고 있는 BMW에 뒤졌고, 길거리에서 쉽게 만날 수 있는 아우디나 폭스바겐에 비해 눈에 띄지 않았다. 브랜드 이미지 역시 꽤나 오래전부터 노후화되었음에도 젊어질 기세도 없었다. 점점 돈 많고 적당히 배 나온 아저씨나 그다지 지혜로워 보이지 않는 아주머니들에게 어울리는 브랜드가 되어갔다. 결과적으로 브랜드는 설렘을 잃어가고, 벤츠만의 매력이 무엇인지 의문이 생겼다. 사람들 머릿속에 벤츠는 우선순위에서 밀리기 시작했다. 위기감 때문일까. 작은 차에도 점점 흥미를 갖기 시작한 국내 고객들의 변화를 읽고 더 큰 대중 시장을 목표로 하는 것일까. 아니면 평생의 브랜드 이미지를 좌우하기 쉬운 엔트리 자동차 브랜드의 중요성을 간파하고 공략하려는 걸까. 적극적이지 않았던 벤츠가 콤팩트 자동차 라인에 힘을 주기 시작했다. S 클래스로 대변되는 무겁고 오래된 이미지를 젊고 가볍게 바꾸기로 한 것이다. 2012년 B 클래스를 시작으로 2013년 A 클래스, 올해 초 CLA 클래스에 이어 얼마 전 GLA 클래스를 출시했다. 벤츠의 콤팩트 라인이라고 할 수 있는 모든 제품을 출시한 것이다. 이번에는 제품만 출시하고 기다리지 않았다. 어느 샌가 페이스북 대문에도 콤팩트 자동차 라인의 사진이 올라 있고, 20대가 사용 빈도가 가장 높다는 인스타그램 계정도 오픈했다. 국내 최초로 도시 장애물 달리기도 후원하고, 잘나가는 브랜드는 모두 한다는 가로수길 팝업 스토어도 만들기로 했다. 그것도 벤츠 콤팩트카만을 위한 특별 공간인 ‘메르세데스 미(Mercedes me)’라는 브랜드를 달고.  
전년 대비 판매가 많이 늘었지만 아직 결과를 예측하기는 이르다. 하지만 벤츠는 벤츠다. 얼마 전 발표된 인터브랜드 선정 ‘2014년 베스트 글로벌 브랜드’에서 벤츠가 100대 브랜드 중 톱 10, 자동차 업계에선 당당히 1위를 차지했다. 여전히 브랜드 가치가 높고 고객들에게 인정을 받는다는 의미다. 이런 브랜드들은 브랜드 확장에 유리하다. 특히 프리미엄 브랜드를 아래로 확장하는 것은 상대적으로 쉽다. 벤츠의 프리미엄 이미지가 긍정적인 영향을 끼치고, 고민하는 고객의 리스크를 줄여줄 것이다.   
벤츠의 젊은 움직임, 기대된다. 이미 수많은 선수들이 즐비한 시장이지만 이번에는 뭔가 다를 것 같다. Best 대신 Nothing을 선택하지는 않을 테니까.

3 다 좋은데 A가 걸리네
‘자동차 회사는 판매대수로 먹고산다’는 업계의 격언이 있다. 판매량을 늘리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은 자신이 강한 시장, 세그먼트, 고객군에서 시장 점유율을 더욱 높이는 것이다. 그리고 그 다음은 당연히 아직 진출하지 못한 곳에 접근하는 것이다. 그러나 유럽 자동차 시장은 대표적인 레드 오션이다. 유럽의 자동차 회사들은 유럽에 혹시 남아 있을지 모르는(!) 아주 작은 틈새라도 개발하려 무수히 많은 크로스오버 모델을 쏟아내고 있다. 그리고 남의 땅에 침을 흘린다. 이것이 프리미엄 브랜드들이 소형차 시장으로 내려오는 이유고, 반대로 폭스바겐과 같은 대중차 브랜드가 프리미엄 시장으로 올라가려는 배경이다.
메르세데스 벤츠는 1980년대에 벤츠 190 시리즈(W201, 현재 C 클래스의 전신)를 새롭게 론칭할 때 비좁은 실내로 시장에 대한 공부를 하지 않았다고 비판받았다. 그래서 1997년 콤팩트 클래스의 첫 모델인 A 클래스를 선보일 때는 확실히 해결했다. 유럽의 콤팩트 클래스인 C 세그먼트 시장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실용성과 실내 공간, 안전이었다. 그래서 벤츠는 브랜드 최초로 앞바퀴굴림 방식을 채택했고 일반 해치백 스타일이 아닌 미니 MPV 형태로 지붕을 높여 실내 공간을 넓혔다. 또 극단적으로 짧아진 보닛의 충돌 안전도가 떨어질 걸 대비해 샌드위치 플로어 팬이라는 혁신적인 구조를 채용했다. 실내 바닥을 이중으로 만들어 충격 흡수력을 높이고 엔진이 실내로 밀려드는 것을 막기 위한 것이었다.
하지만 문제가 발견됐다. 첫째, 샌드위치 플로어 팬 등 독특한 기술을 많이 적용한 결과 원가가 높아져 수익률이 매우 낮았다. 둘째, 실용성이 가장 중요한 MPV 스타일을 채용한 나머지 프리미엄 브랜드에 걸맞은 강한 이미지를 심지 못했다. 게다가 같은 MPV 콘셉트를 채용하고 더 큰 차체를 가진 B 클래스가 2세대 A 클래스와 거의 같은 시기에 등장하자, 두 모델이 서로 판매 간섭을 일으키기에 이르렀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 나온 것이 2012년의 3세대 A 클래스다. 기술적으로는 2세대 B 클래스와 같은 플랫폼을 사용하지만 콘셉트는 확연히 다르다. A 클래스는 훨씬 다이내믹하고 스포티한 정통 스포츠 해치백의 분위기를 띠며, B 클래스는 이전 세대보다는 확실히 럭셔리하고 여유로운 분위기의 콤팩트 프리미엄 MPV의 색깔을 보인다. 기술적으로는 두 모델 모두 값비싼 샌드위치 플로어 팬을 버리고 상위 모델들과의 부품 및 모듈 공유율을 높이는 등 원가 절감에 심혈을 기울였다. 그리고 여기에 2가지 크로스오버 모델이 추가된다. CLS와 유사한 4도어 쿠페 디자인의 CLA, 그리고 크로스오버 유틸리티 모델(CUV)인 GLA다. 또 한 가지, AMG 모델도 추가됐다. MPV인 B 클래스를 제외한 젊은 이미지의 A, CLA, GLA는 45 AMG 4매틱 모델을 가짐으로써 모델의 역동적인 인상을 한층 강화하고 정통 메르세데스 벤츠 라인업의 일원임을 공표했다. 강한 이미지를 통해 새로운 모델의 존재감을 심고, 메르세데스 브랜드 아이덴티티를 갖게 하는 데에는 성공한 것으로 평가된다. 하지만 초기의 임팩트 있는 이미지 빌드업이 실제 판매하고는 다를 수도 있다는 사실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틈새 모델인 CLA와 GLA는 현재의 이미지를 유지해도 전혀 문제가 없을 듯하며, B 클래스는 이미 다른 콤팩트 클래스 모델들과 차별화에 성공했다. 문제는 A 클래스다. 과도하게 스포티한 이미지를 강조한 나머지 엔트리 레벨 트림까지도 지나치게 단단하고 거친 승차감을 보이는 부분은 벤츠답지 못하다. 따라서 A 클래스는 AMG 모델을 이미지 모델로 사용하고, 나머지 모델들은 유럽 해치백 모델의 본류에 약간의 프리미엄 이미지만을 갖는 수준의 파인 튠이 필요해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