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말 감사합니다. 카페스트를 이전보다 크고 화려하게 만들 수 있도록 도와주신 모든 분들께 감사 인사를 전하고 싶습니다.”
크리스 에반스는 감격에 겨워 목이 멘 듯 쉽게 말을 잇지 못했다. 참, 여기서 말하는 크리스 에반스는 별이 그려진 둥근 방패를 들고 다니는 슈퍼 히어로 캡틴 아메리카의 배우가 아니다. 그와 이름은 똑같지만 키가 좀 더 작고, 나이가 좀 더 많은 영국의 방송인이다. 우리나라에선 그의 이름을 아는 사람이 많지 않지만 영국에선 유재석만큼 인기가 높은 방송인이다.
지난 8월 22~24일 영국 햄프셔의 레이버스토크 파크 팜(Laverstoke Park Farm)에서 ‘카페스트 사우스(CarFest South)’가 열렸다. 카페스트는 근사한 차와 자동차 경주를 구경하고, 경매에 참가하고, 밴드의 공연을 감상하고, 다양한 프로그램을 즐길 수 있는 자동차 축제 같은 건데 이 행사를 바로 크리스 에반스가 기획했다. 카페스트는 ‘BBC 칠드런 인 니드(BBC Children in Need)’의 프로그램 중 하나로 기획됐다. BBC 칠드런 인 니드는 BBC가 매년 진행하는 행사로 수익금은 모두 불우아동을 돕는 데 쓰인다. 이날 행사장에는 희귀한 클래식카가 등장해 힐 클라임 경주를 펼쳤다. 이 중에는 에반스의 차도 있었다.
지금은 영국에서 가장 몸값이 비싼 방송인이지만 처음부터 그가 잘나갔던 건 아니다. 낮에는 맨체스터의 피카딜리 라디오에서 잡다한 일을 하고, 저녁엔 술집에서 DJ로 일하며 틈틈이 신문 배급소에서 신문을 분류하는 일까지 했던 그의 인생이 빛을 보기 시작한 건 버진 라디오에 PD로 입사하면서다. 이곳에서 입지를 다진 그는 BBC로 진출해 아침 텔레비전 쇼인 ‘더 빅 브렉퍼스트’를 진행하면서 인기를 얻기 시작했다. 사람들은 그가 내뱉는 독설에 열광하고, 즐거워했다. 그가 초창기에 방송으로 벌어들인 돈은 8000만 파운드(약 1343억원)다. 참고로 요즘 그의 월급은 60만 파운드(약 10억원)다.  
10여 년 만에 백만장자에 오른 그는 희귀한 차를 하나 둘 모으기 시작했다. 특히 페라리 마니아인 그는 클래식 페라리를 수집하는 새로운 취미를 가졌다. 지난 2010년에는 36대만 제작한 1963년형 250 GTO를 1200만 파운드나 들여 손에 넣기도 했다. 그의 차고를 거쳐간 페라리만 20대가 넘는다. “250 GTO는 제가 꼽는 최고의 클래식카입니다. 죽기 전에 꼭 손에 넣고 싶은 차이기도 했고요. 적어도 하루에 5번은 이 차를 떠올립니다. 이보다 근사하고, 스릴이 넘치는 차는 없습니다.” 하지만 에반스가 클래식 페라리만 수집하는 건 아니다. 그는 지난 5월 모나코에서 열린 경매에서 제임스 헌트가 몰았던 F1 머신 헤스케스 308-1을 손에 넣었다. 1974년 F1 그랑프리에서 헌트에게 우승을 안겨줬던 머신으로 낙찰가는
23만 파운드다.  
클래식카 수집가는 크게 두 종류로 나뉜다. 투자를 목적으로 클래식카를 산 다음 차고에 넣어두고 값이 오를 때를 기다리는 사람과 클래식카 행사를 찾아다니며 자랑하고 즐기는 사람이다. 크리스 에반스는 후자에 가깝다. 그는 앞서 소개한 ‘카페스트 사우스’ 행사에 라페라리를 가져갔다(에반스는 라페라리의 첫 영국인 오너다). 그리고 5명의 후보자에게 열쇠를 넘겨준 다음 1000파운드씩 받았다. 그가 챙긴 5000파운드는 고스란히 BBC 칠드런 인 니드의 불우아동 돕기 기금으로 들어갔다. 요즘 영국 방송국에서는 제레미 클락슨의 계약 갱신 기간이 다가오면서 에반스가 <톱기어>의 진행자 자리를 꿰차는 것 아니냐는 소문이 돌고 있다. 에반스는 “그럴 일 없다”며 트위터에 글을 남겼지만 어쩌면 앞으로 <톱기어>에서 그를 보게 될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