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적으로 SUV 인기가 높아지면서 부자들도 SUV를 찾기 시작했다. 그런데 처음엔 부자들이 살 고급 SUV가 마땅치 않았다. 메르세데스 벤츠 S 클래스를 타던 사람들에게 지프 그랜드 체로키는 성에 차지 않았다. 그 틈새를 비집고 2002년 포르쉐가 카이엔을 만들었는데 예상 밖의 히트작이 됐다. 그렇게 카이엔은 포르쉐를 살렸다. 

갑자기 온 세상이 SUV만을 찾는 것 같았다. SUV가 없는 자동차 전시장에는 고객이 찾아오지 않았다. 과거 SUV 따위는 상상도 할 수 없었던 고급차 전시장도 예외가 아니었다. 캐딜락과 링컨이 SUV를 만들고, 벤츠와 BMW 라인업에 SUV가 줄줄이 들어섰다. 이제는 슈퍼카 메이커 람보르기니가 우르스를 내놓고, 롤스로이스와 벤틀리도 저마다 화려한 SUV를 내놓는다. 전 세계 고급차 판매의 절반 이상이 SUV가 아닌가 싶다. 

SUV는 커다란 차체가 안전해 보인다. 사고가 나더라도 상대방보다 덜 다칠 듯하다. 높이 앉으니 시야도 좋다. 그 위에 올라탄 내 모습이 썩 괜찮아 보인다. 내 차가 아니라도 내 가족이 안전하다면 마음이 편하다. 주말이면 나의 야외 활동이 좀 더 멋져 보인다. 배기가스가 좀 더 나오고, 연료 소비가 더 많더라도 안전과 품위를 생각하면 당연한 선택이다. SUV는 현대인의 이기적인 마음에 부응하는 차종이다.

럭셔리 SUV는 여느 SUV와 다른 고급스러움이 필요하다. 일반 SUV에 크롬을 덧대고, 비싼 옵션을 몇 개 더해 만들 수도 있지만 더욱 특별한 차로 만들기 위해선 전통을 입히고, 슈퍼카에 버금가는 디자인과 성능을 담아야 한다. 무겁고 무게중심이 높은 차에 쉬운 일은 아니다. 값비싼 가죽으로 감싼 실내는 때로 진흙 묻은 신발이 민망스럽다. 한없이 비싸지는 제조원가에 무심할수록 차의 품격은 높아간다. 

LAND ROVER 
RANGE ROVER
레인지로버는 ‘사막의 롤스로이스’라는 별명이 말하듯 가장 럭셔리한 SUV였다. 1970년부터 고급차로 데뷔한 덕분에 독보적인 위치를 지켰다. 레인지로버는 영국 여왕이 타는 차였고, 진흙을 잔뜩 묻히고 호텔 입구에 도착해도 용서가 되는 차였다. 그렇기에 레인지로버는 SUV 고유의 역할뿐 아니라 고급 의전차로도 많이 쓰인다. 런던의 고급 호텔마다 늘어선 레인지로버가 전혀 어색하지 않다. 레인지로버가 롱휠베이스 버전을 내놓는 이유다.

랜드로버의 피를 물려받은 레인지로버가 오지 탐험에서 얻은 경험과 전통은 그 어느 차와 비교할 수 없다. 랜드로버의 다른 차보다 비싼 레인지로버가 흙길을 달리는 비율은 더 높았다. 귀족들이 평소 롤스로이스를 타다가 자신의 장원(莊園)을 둘러볼 때만 레인지로버를 타기 때문이다. 레인지로버의 오프로드 가동률은 100퍼센트였다. 오늘 온 레인지로버 시승차는 최근 페이스리프트된 모델이다. 헤드램프와 프런트 그릴, 범퍼 디자인이 바뀌었다지만 내 눈엔 항상 봐오던 레인지로버 그대로다. 조개껍데기처럼 위에서 감싸는 보닛과 검게 칠한 D 필러, 위아래로 열리는 트렁크 도어 등 레인지로버만의 특징이 그대로 이어진다. 레인지로버의 모양 그 자체가 전통을 잇고, 역사를 만들어간다. 정직한 2박스 스타일 보디에 품위가 깃들어 있다.
 

높은 운전석에 앉아 에어 서스펜션을 한껏 올렸다. 차의 높이를 올리는 순간 나의 신분도 동반 상승한다. 높이 앉아 탁 트인 시야를 즐길 때 우쭐한 기분이 든다. 높이 앉아 둘러보는 사방 시야에 고급스러움이 깃들어 있다. 높은 지붕과 수직에 가까운 앞 유리창은 드넓은 공간을 만든다. 실내를 감싼 가죽과 우드그레인은 마무리가 완벽하다. 최고급차의 위상에 걸맞은 수준이다. 이 부드러운 가죽은 어디서 기른 소에서 가져온 것일까? 센터페시아는 10인치 디스플레이 두 개로 깔끔하게 정리했다. 럭셔리 SUV는 첨단 기술에도 적극적이다.

레인지로버는 구름에 달 가듯 부드럽고 조용하게 움직인다. 달빛 아래 잔잔한 물결을 헤치는 요트 같다. 에어 서스펜션으로 만드는 부드러운 승차감은 이보다 더 고급스러울 수 없다. 레인지로버가 VIP 차로 쓰이는 까닭이다. 시승차의 V8 디젤 엔진은 매우 조용해서 디젤 엔진임을 알아챌 수 없을 정도다. 75.5kg·m의 최대토크가 1750rpm부터 시작돼 언제나 뿌듯한 느낌이 든다. 레인지로버의 충분한 엔진 파워는 우아함을 위한 것이다. 무게가 2650킬로그램이지만 순발력이 좋은 덕에 순간 가속이 눈 깜짝할 사이다. 이런 것이 진정한 럭셔리다. 저속에서 고속으로 이어지는 매끄러운 감각은 독보적이다. 알루미늄 차체와 에어 서스펜션이 어우러져 만들어내는 주행감각은 소음과 진동이 잘 억제됐다. 에어 서스펜션이 주는 쿠션에 부드러운 스티어링 감각이 고급스럽고, 한편으로는 안정감이 뛰어나다. 

아스팔트가 끝나도 거칠 것이 없다. 저속기어와 전자동 지형반응 시스템을 갖춘 레인지로버는 어떤 지형이라도 헤쳐나갈 수 있다. 비바람이 몰아쳐도, 내 앞 길이 진창이나 모래밭이라도 문제가 되지 않는다. 까다로운 오프로드 주행 기술도 차가 다 알아서 한다. 랜드로버에는 어떤 길도 헤쳐나간다는 신뢰가 있다. 우아한 기품이 흐르는 차에 오프로드 주파 능력이 넘쳐난다.

레인지로버는 언제나 눈에 익은 모습 그대로다. 부드러운 주행감각, 높이 앉아 내려다보는 우월한 시야, 세월이 지나도 변함없는 신뢰, 그리고 궁극적인 생존 도구라는 이미지로 요약된다. 1억8000만원이 넘는 보그 SE는 레인지로버에서 가장 아랫급 모델이다. 롱휠베이스 모델은 3억원이 넘는다. 비싼 값은 최고의 자리를 지키는 하나의 수단이다. 롤스로이스 컬리넌과 벤틀리 벤테이가에 맞서는 차로 레인지로버가 우뚝 섰다. 레인지로버는 이제 ‘사막의 롤스로이스’가 아니라 ‘사막의 레인지로버’다.

페이스리프트된 레인지로버는 벨라처럼 매끈한 대시보드를 챙겼다. 두개의 모니터가 깔끔하면서 고급스러운 분위기를 낸다. 실내를 감싼 가죽과 우드그레인은 마무리가 완벽하다.

MASERATI LEVANTE
2003년 콘셉트카 쿠뱅을 선보인 마세라티는 2016년 르반떼를 내놓았다. 르반떼는 오랜 준비 과정을 거친 마세라티 최초의 SUV다. 기블리 플랫폼을 쓴, 승용차 베이스의 SUV는 마세라티인 만큼 요란한 배기음과 스포티한 달리기를 기대하게 한다. 가까이 다가서니 프레임 없는 유리창과 패들시프트가 먼저 눈에 들어온다. 그래, 이 차는 스포츠 SUV인 거다. 알피에리 콘셉트가 떠오르는 프런트 그릴과 공기구멍을 낸 펜더로도 마세라티임을 쉽게 알 수 있다. 그런데 길이가 5미터를 넘고, 너비가 2미터에 가까운 커다란 차체가 정작 이탈리아에 어울리는지 궁금하다. 

르반떼는 모든 마세라티가 그렇듯 고성능과 우아함을 아우른 차다. 실내는 다양한 색상과 트림을 조합하는 게 가능한데, 기블리의 분위기를 가져온 우드트림이 썩 어울린다. 에르메네질도 제냐와 협력해 만든 실내는 갈색과 검은색이 조화를 이루었다. 대시보드 위에 달린 마세라티의 아날로그시계는 고전적인 아름다움을 추구한다.

시승차는 S 모델로 3.0리터 트윈터보 V6 휘발유 엔진을 얹었다. 최고출력 430마력, 최대토크 59.2kg·m를 뿜어댄다. 무게가 2.2톤이 넘지만 1600rpm부터 최대토크의 90퍼센트를 뽑아내 0→시속 100킬로미터 가속을 5.2초 만에 끝낸다. 가볍게 가속하는 차는 스포츠카와 다르지 않은 움직임을 보인다. 스티어링휠은 예리하고, 타이어는 바닥에 들러붙었다. SUV에 흔치 않은 일이다. 스포츠 모드를 누르자 배기음이 펑펑 터진다. 포르쉐 카이엔도 이랬나 싶을 정도로 SUV에 스포츠카 감각이 넘쳐난다. 낮은 무게중심과 50대 50의 무게배분으로 스포티한 드라이빙이 가능하다. 한마디로 마세라티 모델 중 가장 마음에 드는 마세라티였다.

상대적으로 낮게 달리는 맛, 우렁찬 배기음 등이 어우러져 격정적으로 달린다. 단단한 댐퍼 때문인지 안정감이 좋아 마구 몰아칠 수 있다. 오히려 브레이크 성능이 조금 부족하지 않은가 싶다. 스포츠카처럼 달리지만 SUV로서 모든 장점을 누릴 수 있다. 운전 자세부터 조금 높이 앉아 편한 자세를 취할 수 있다. 성격은 다르지만 레인지로버에 대응할 때 경쟁력이 충분하다는 생각이다. 

ZF 8단 자동변속기는 큼직한 패들시프트로 재미를 더할 수 있다. 마그나 슈타이어의 AWD 시스템은 보통 땐 뒷바퀴로 구동력을 100퍼센트까지 보내는데 필요하면 앞바퀴로 50퍼센트까지 보낸다. 뒷바퀴에 넣은 기계식 LSD는 토크벡터링과 함께 코너링 성능을 돕는다. 스카이훅 에어 서스펜션은 고속에서 차체를 35밀리미터 낮추고, 오프로드에 들어서면 40밀리미터 높일 수 있다. 에어 서스펜션은 유용한 만큼 고급 SUV에 필수 아이템이다. 럭셔리 SUV에 전면추돌 경고시스템이나 차선이탈 경고시스템 같은 ADAS 준자율주행 시스템은 당연하다.
르반떼는 드넓은 공간과 웅장한 사운드를 지닌 슈퍼카, 아니 SUV다. 전통적인 SUV와 스포츠카의 결합이다. 달리는 재미 하나로 럭셔리 SUV의 임무를 다한다. 스포츠 투어러의 명문 마세라티의 전통은 SUV로 계속된다.    

글_박규철(편집위원)

르반떼는 마세라티 가문의 SUV답게 스포츠카 감각이 넘쳐난다. 실내는 고급스럽고 우아하지만 움직임은 스포츠카와 다르지 않다. 스티어링휠이 예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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