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규어가 SUV를 만든다고?” 2013 프랑크푸르트 모터쇼에서 화제의 중심은 단연 재규어였다. 재규어는 유럽 최대 모터쇼에서 새로운 모듈러 알루미늄 아키텍처(Modular Aluminium Architecture)를 소개하고 SUV의 형태를 갖춘 C-X17 콘셉트를 공개했다. 양산차라고 해도 손색없을, 군더더기 없이 깔끔하고 완벽한 모습은 일종의 선언과도 같았다. “재규어는 앞으로 이런 SUV를 만들 것입니다”라는 선언 말이다. 

이후 재규어는 C-X17을 데리고 여러 모터쇼를 순회하며 SUV 알리기에 나섰다. 그리고 2015 디트로이트 모터쇼에서 첫 번째 양산형 SUV를 세상에 공개했다. C-X17을 다듬은 녀석의 이름은 F 페이스였다. “많은 사람들이 C-X17에 긍정적인 반응을 보였습니다. 양산하지 않을 수 없을 만큼요. F 페이스는 F 타입의 우아하고 고급스러운 인테리어와 디자인, 다이내믹한 달리기를 물려받은 SUV입니다. 패밀리 스포츠카라고 할 수 있죠.” 디자인 디렉터 이언 칼럼의 말이다.    

‘페이스(pace)’에는 ‘걸음’이란 뜻이 있다. F 페이스는 재규어가 SUV 시장에 내딛는 첫걸음이다. 이들은 2016년부터 F 페이스의 판매를 시작한다고 밝혔다. 브랜드 최초의 SUV인 만큼 본격적인 판매에 앞서 특별한 이벤트로 관심을 모으는 게 필요했다. 회사에 기네스 도전 팀이 따로 있는 것 아닌가 생각될 만큼 기발한 도전으로 주목을 끌었던 재규어는 이번엔 프랑크푸르트 모터쇼장 근처에 높이가 19.8미터에 달하는 거대한 루프를 세웠다. 그리고 모터쇼가 열리기 하루 전날, F 페이스로 루프를 도는 이벤트를 진행했다. 영국의 전문 스턴트 드라이버 테리 그랜트가 운전대를 잡았다. 모두가 숨죽이며 지켜보는 가운데 새파란 F 페이스가 멋지게 루프를 한 바퀴 돌았다. 재규어의 첫 번째 SUV다운 인상적인 이벤트였다.

F 페이스는 길이가 4731밀리미터, 높이가 1652밀리미터, 폭이 1936밀리미터로 메르세데스 벤츠 GLC나 BMW X3보다 조금 크다. 지금 이 시장은 아우디와 BMW, 벤츠 등의 럭셔리 브랜드와 닛산, 토요타, 현대, 기아 등의 중저가 브랜드가 각자의 영역에서 치열하게 경쟁하는 시장이다. 재규어는 재규어다운 SUV로 차별을 꾀했다. F 타입과 세단에서 물려받은 앞 더블 위시본, 뒤 인티그럴 링크 서스펜션으로 다이내믹한 주행 성능을 완성했다. 토크 벡터링과 전자식 파워스티어링으로 보다 정교하고 날카로운 핸들링을 만들었다. 랜드로버의 축적된 오프로드 기술과 경험도 F 페이스의 든든한 자산이다. 미끄러운 노면에서 가속페달을 밟지 않고도 스스로 움직이는 저속 크루즈 컨트롤(ASPC)은 오프로드에서도 빛을 발한다. 재규어의 차별화 전략은 일단 성공이다. F 페이스는 2016년 재규어 글로벌 판매량을 83퍼센트나 올리는 데 혁혁한 공을 세웠다.

재규어의 SUV 시장 도전은 당연하겠지만 여기서 끝이 아니다. 그런데 다음 모델이 조금 남다르다. 2016년 11월 재규어는 오직 배터리와 전기모터로만 달리는 I 페이스 콘셉트를 선보였다. 길이가 4680밀리미터, 높이가 1560밀리미터, 폭이 1890밀리미터로 F 페이스보다 조금 작은 I 페이스는 재규어가 처음 선보인 전기 SUV다. 90kWh 리튬이온 배터리팩을 바닥에 깔았는데 유럽 WLTP 테스트 기준 주행가능거리가 480킬로미터를 넘는다. 미국 환경보호청(EPA) 기준 주행가능거리는 380킬로미터다. “우리는 I 페이스가 운전자를 위한 차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지루한 전기차 말고 짜릿하고 화끈한 전기차 말이죠. 그래서 두 개의 놀랄 만큼 콤팩트한 전기모터를 개발했습니다. 앞뒤 액슬에 달린 이 모터가 최고출력 400마력, 최대토크 71.4kg·m를 만들어냅니다. F 타입 SVR과 같은 수준이죠.” 재규어 랜드로버 제품라인 디렉터 이언 호반의 말이다. 참고로 재규어가 밝힌 I 페이스의 0→시속 97킬로미터 가속 시간은 4초대이며, 50kW DC 고속충전기를 이용하면 90분 만에 배터리를 80퍼센트까지 충전할 수 있다. 

브랜드 라인업까지 따로 만들며 전기차를 만들어온 BMW도 아니고 재규어에서 전기 SUV를 내놓다는 게 의아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재규어와 랜드로버는 2012년부터 전기차 시대를 본격적으로 준비해왔다. XJ e-플러그인 하이브리드 프로토타입과 이보크 e 프로젝트를 거치며 재규어 랜드로버 엔지니어들은 리튬이온 배터리 셀 설계와 전기모터 설계, 열 관리 시스템 등에 관한 지식을 축적했다. 2016년부터 출전한 포뮬러 E 챔피언십은 전기차 기술에 관한 노하우를 다지는 시험장 역할을 톡톡히 했다. 재규어가 전기 SUV를 당당히 시장에 선보일 수 있는 건 이런 경험으로 자신감이 차곡차곡 쌓였기 때문이다. 올해 국내에도 출시되는 I 페이스는 전기차 시장에 적잖은 파장을 일으킬 것으로 보인다. 

D 세그먼트 SUV와 전기 SUV로 라인업을 가다듬은 재규어가 다음에 노리는 시장은 지금 가장 뜨거운 C 세그먼트 SUV 시장이다. 지난해 7월 재규어는 아직 출시도 하지 않은 콤팩트 SUV E 페이스로 기네스 기록을 세웠다. 점프한 상태에서 차체를 270° 회전하는 배럴 롤(Barrel Roll)에 성공한 거다. 재규어 관계자는 “1974년 개봉한 007 시리즈 <황금총을 가진 사나이>에서 처음 선보였던 자동차 스턴트를 재현하고 싶었다”고 밝혔다. 새로운 기네스 기록을 챙긴 E 페이스가 4월 국내에 정식으로 출시된다. 이로써 재규어 SUV 라인업의 큰 틀이 잡혔다. 

재규어의 SUV 형제들은 모두 페이스라는 이름을 챙겼다. 다들 각각의 분야에서 재규어의 첫걸음을 내딛는 모델이다. 하지만 이들의 공통점은 하나로 모아진다. 다이내믹한 즐거움을 잃지 않는 SUV라는 것이다. 이건 재규어가 추구하는 방향과도 일치한다. 재규어는 늘 아름답고 빠른 차를 추구해왔다. 크기도, 성격도 조금씩 다르지만 재규어 SUV에는 재규어의 ‘패스트(Fast)’ DNA가 녹아 있다.  

I 페이스와 E 페이스, F 페이스로 구성된 재규어 SUV가 질주를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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