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규어 브랜드는 성장 일로다. 영국 회계연도 기준(매년 4월 1일부터 1년) 2014·15년 7만6930대였던 전 세계 판매량은 이듬해 9만449대로 23퍼센트 늘었다. 아름다운 2인승 스포츠카 F 타입이 브랜드의 중심을 잡고, 열정적인 콤팩트 스포츠 세단 XE가 힘을 보탠 결과였다. 2016·17년 회계연도의 성장세는 더 극적이었다. 17만2848대 판매로 전년 대비 무려 83퍼센트나 증가했다. 일등 공신은 짐작하는 대로 F 페이스였다. 재규어 최초의 SUV는 그해 6만7955대가 팔리며 단숨에 브랜드 최다 판매 모델로 자리했다. 

하나 더 눈여겨봐야 할 숫자가 있다. 형제 브랜드 랜드로버의 콤팩트 SUV 레인지로버 이보크다. 이 차는 지난 2011년 이래 전 세계에서 60만대 넘게 팔렸다. 중형 SUV로 성장의 단맛을 본 재규어가 그보다 작은 SUV를 만드는 걸 망설일 이유가 없었다는 얘기다. 게다가 그들은 이미 훌륭한 견본 모델과 기술도 보유하고 있었다. 앞서 말한 이보크와 랜드로버 디스커버리 스포츠 말이다. 두 랜드로버는 영국 북서부 헤일우드 공장에서 함께 생산한다. 여기에 지난해 말 한 차종이 추가됐다. 재규어 E 페이스다. 

F 타입과 F 페이스의 그것을 절묘하게 조합해둔 분위기의 인테리어.

그렇다. 재규어의 두 번째 양산 SUV인 E 페이스는 랜드로버 형제들과 기본 보디 구조, 파워트레인, 그리고 그 밖의 잡다한 기계장치를 공유한다. 하지만 재규어의 꼬마는 그들과 확연하게 구별된다. 생김새부터 크기, 움직임의 질감과 전반적인 차의 성격까지 말이다. 물론 E 페이스 쪽이 보다 빠르고 스포티하며, 달리는 즐거움 역시 한층 배가돼 있다. 

실상 E 페이스 개발의 가장 큰 숙제는 공유 플랫폼의 한계를 극복하는 것이었다. 가장 기본이 되는 이보크 플랫폼은 멀게는 재규어 랜드로버가 포드 산하에 있을 때의 기술까지 포함하고 있다. 당연히 재규어가 바라는 수준의 무게를 맞출 수 없었다. 하지만 완전히 새로운 경량 플랫폼을 설계하는 건 무리였다. 결국 엔지니어링 팀이 아이디어를 짜냈다. 예컨대 E 페이스의 보닛과 앞 펜더, 지붕과 테일게이트는 모두 알루미늄으로 제작했다. 이를 통해 강철 소재 대비 약 34킬로그램 감량이 가능했다. 보디 옆면 패널은 두께를 세심하게 줄인 강철로 만들었고 여기서 다시 4킬로그램 가까이 줄었다. 

반대로 섀시는 한층 강화했다. 더블 위시본 구조의 서스펜션과 연결되는 앞쪽 서브프레임은 마운트 지점을 뒤에 두고 차체에 직접 고정했다. 뒤 서스펜션 구조는 예쁘장한 형제 모델과 완전히 다르다. 한 급 위 SUV인 F 페이스와 같은 인티그럴 링크 설계로, 위쪽 서브프레임과 아래쪽 컨트롤암을 잇는 두툼한 너클 역시 F 페이스의 그것과 같다. 결과적으로 E 페이스는 이보크에 비하면 20퍼센트 더 단단하고, 디스커버리 스포츠보다 25퍼센트 더 견고하다. 

섀시 세부를 새롭게 설계하면서 차체 규격에도 차이가 생겼다. 길이는 4395밀리미터, 너비는 1984밀리미터이며 휠베이스는 2681밀리미터다. 소형 재규어 SUV의 전반적인 크기는 이보크와 디스커버리 스포츠 사이에 위치한다. 재규어 랜드로버로선 묘수를 낸 셈이다. 이보크는 레인지로버 라인업의 고급한 입문 모델이지만 크기는 콤팩트한 C 세그먼트 SUV에 가깝다. 반면 디스커버리 라인의 볼륨을 책임지는 디스커버리 스포츠는 중형 D 세그먼트 SUV 수준의 넉넉한 공간과 크기를 갖추고 있다. E 페이스는 두 랜드로버가 지니지 못한 성격과 시장을 공략한다. ‘동급의 스포츠카’를 지향했고, 콤팩트 C 세그먼트 SUV보다 여유로운 공간을 챙겼다. 외부 경쟁대상 중 비교하면 E 페이스의 위치는 BMW X1과 메르세데스 벤츠 GLC 사이에 있다. 

겉모습과 실내에는 21세기 재규어의 디자인 언어가 고스란히 녹아 있다. 사다리꼴 그릴, 보닛 위에 불끈 솟아오른 근육, 뒷바퀴 위를 가로지르는 탱탱한 둔부, F 타입 스포츠카에서 가져온 날렵하고 긴장감 어린 그린하우스 윤곽 등이 바로 그렇다. 하지만 ‘가족과 닮았다’ 정도로는 빠르게 성장하며 경쟁도 치열한 세그먼트에서 뾰족한 성과를 내기 어렵다. 그 자동차만의 매력적인 무언가가 있어야 한다는 얘기다. 

재규어는 레이싱 헤리티지에서 해답을 찾았다. 그들은 레이싱 무대에 행복한 기억을 갖고 있다. C 타입과 D 타입 경주차로 3연패(1955~57년) 포함, 5번의 우승을 이뤄낸 1950년대 르망 24시간 내구레이스가 대표적이다. 최근에는 포뮬러 E에서도 눈에 띄는 활약을 하고 있다. 디자인 팀은 레이싱 서킷에서 영감을 얻은 시케인(Chicane) 라인을 고안해냈다. 시케인은 경주차의 속도를 제어하기 위해 설계한 이중 커브 코스다. E 페이스 대시보드 윗면에서 발견할 수 있는 시케인 라인은 힘차게 뻗은 직선과 급하게 꺾인 곡선이 절묘하게 어우러지며 긴장감을 자아낸다. 시케인 코스를 돌파하는 경주차의 역동적이고 속도감 넘치는 움직임이 절로 떠오르는 이 라인은 갸름한 테일램프 아래쪽의 포지셔닝 라이트에서도 발견할 수 있다. 

재규어 디자이너들의 유쾌한 장난(?)도 곳곳에 숨어 있다. 윈드스크린에 숨어 있는 재규어 가족 그래픽이 그중 하나다. 어미(또는 아비) 재규어와 그를 따르는 새끼 재규어의 모습을 그린 것인데, 디자인 팀 내부에서 이 차가 새끼(Cub)라는 애칭으로 통했다는 뒷이야기까지 알고 나면 슬며시 웃음 짓지 않을 수 없다(이 재규어 ‘새끼’ 그래픽은 퍼들램프에도 있다). 이 밖에도 앞 시트 라벨과 수납함 고무매트의 재규어 표피 무늬 패턴, 35밀리미터 라이카 카메라 렌즈의 조작감을 흉내 낸 공조장치 다이얼 등 작지만 아름다운 디테일이 탑승객의 기분까지 유쾌하게 만든다. 

성능과 디자인은 재규어 브랜드의 핵심 가치다. 이름 끝에 페이스(Pace)가 붙는 재규어는 여기에 한 가지 가치를 더한다. 라이프스타일의 확장이다. E 페이스 객실은 이 모든 가치를 선명하게 드러낸다. 대각의 버팀대가 대시보드에서 센터터널까지를 이으면서 운전석을 감싸는 콕핏 구조는 재규어가 사랑해 마지않는 스포츠카 F 타입의 그것과 다르지 않다. 드라이버스 카를 지향하는 차답게 변속기 조작도 재래식 시프트레버를 통해 이뤄진다. 몸을 감싸는 스포츠 시트는 대비가 뚜렷한 스티칭으로 마감해 스포티한 분위기를 한층 북돋운다. 

TFT 디지털 계기반과 인컨트롤 터치 인포테인먼트 등 최신 재규어의 인테리어 경향도 고스란히 따랐다. 내장재를 신중하게 선택하고 사용한 인테리어는 흔하디흔한 나무 장식 없이도 상류 자동차의 분위기가 물씬하다. 어떤 점에선 윗급 F 페이스보다도 고급스러운 느낌이다. SUV의 다목적 성격에 걸맞게 실내엔 충분한 수납공간과 외부기기 확장 포트가 마련돼 있다. 8.5리터 용량의 센터콘솔엔 1.0리터짜리 음료수병 2개가 너끈히 들어가고, 이 밖에도 구석구석 자잘한 물건을 보관할 수 있는 40리터가량의 수납공간이 더 있다. 트렁크 적재 용량은 484리터를 기본으로 뒷자리 등받이를 모두 접었을 때 1141리터까지 확장된다. 

USB 연결장치는 모두 5개나 된다. 센터콘솔에 놓인 2개의 USB 포트로 연결하면 1280X542픽셀 스크린으로 고해상도 영상도 감상할 수 있다. 여기에 앞좌석과 센터콘솔, 트렁크 등에 별도의 전원 연결장치 4개가 더해진다. 차 안 승객이 자신의 스마트기기를 연결하지 못해 쩔쩔맬 일은 없을 거란 얘기다. 컵홀더와 센터콘솔 사이에는 태블릿을 놓아둘 자리도 있다. 국내 시판 모델은 전용 T맵과 지니뮤직 애플리케이션도 기본 적용한다. 인컨트롤 터치 인포테인먼트 시스템의 인컨트롤 앱스 메뉴를 통해 사용할 수 있다. 

E 페이스는 재규어 역사에 또 하나의 족적을 남겼다. 4기통 엔진만 쓰는 최초의 재규어 모델이라는 사실이다. 한국에는 그중 249마력을 내는 인제니움 가솔린 엔진 모델(P250)이 도입된다. 최고출력은 5500rpm에서 발휘되고, 1300~4500rpm의 폭넓은 영역에서 37.2kg·m의 카랑카랑한 최대토크가 나온다. 2.0리터 인제니움 가솔린 터보는 동급에서 가장 부드러운 엔진은 아니지만 실제 도로에서 구현하는 성능은 흠잡을 데 없다. 독일 ZF가 공급하는 9단 자동변속기와의 빈틈없는 호흡도 기대해볼 만하다. 

플랫폼은 엔진을 가로 방향으로 얹고 앞바퀴를 굴리는 설계가 기본이지만 E 페이스 한국 출시 모델은 AWD를 기본으로 한다. 주행 상황, 출력의 크기에 따라 토크를 뒷바퀴로 전하는 일반적인 AWD 시스템이다. 안정된 핸들링과 주행품질이 장점이고, 구조가 비교적 간단하고 가벼워 연료 소모량도 적은 편이다. 이번에 한국에는 선보이지 않지만 300마력과 40.8kg·m의 파워를 지닌 P300 R 다이내믹 모델은 액티브 드라이브라인을 쓴다. 0.1초 만에 모든 엔진 출력을 뒷바퀴에 전달할 수 있고, 전자제어식 클러치로 좌우 뒷바퀴의 구동력을 적극 제어하는 토크벡터링 기능까지 담은 ‘뒷바퀴굴림이나 다름없는’ AWD 시스템이다. 

‘동급의 스포츠카’를 자처하는 SUV지만 오프로드 주행에 대한 대비도 착실하다. 도강 깊이 500밀리미터는 랜드로버 형제들을 제외하면 거의 동급 최고 수준이다. 주행모드는 노멀과 다이내믹, 에코, 그리고 레인·아이스·스노의 4가지인데 이 중 마지막 모드가 험로주행을 뒷받침한다. 랜드로버의 전천후 지형 전문가들이 설계한 저속 크루즈 컨트롤 장치 ASPC(All Surface Progress Control)와 함께 기능한다. ASPC의 성능은 F 페이스를 통해 충분히 입증한 바 있다. 타이어가 푹푹 파고드는 진창에서 앞서 지나간 차의 마지막 발자취를 능수능란하게 활용하는 모습은 특히 인상적이다. 

재규어 랜드로버에 따르면 지난해 전 세계 콤팩트 SUV 판매량은 980만대에 달했다. 당분간 성장세가 주춤할 조짐도 없다. 이런 열띤 분위기에서 E 페이스의 몫은 얼마큼 될까? 미래는 섣불리 예단할 수 없다. 하지만 확실히 말할 수 있는 부분도 있다. 이 차를 구입하거나 구입할 의사가 있는 사람의 90퍼센트가량은 재규어 첫 경험자일 거란 점이다. E 페이스는 스타일리시하고, 한 성격 하며, 어깨를 으쓱하게 하는 면모도 있는 프리미엄 콤팩트 SUV라 그들에게 꽤 설득력 있게 다가갈 수 있다. 물론 중요한 건 가격일 터다. 한국에선 5530만원(P250S)부터 시작해 6070만원(P250SE), 6470만원(P250 R 다이내믹 SE) 가격표를 달고 4월부터 판매에 들어간다.   

수심 500밀리미터의 강물쯤 끄떡없다. 영리한 험로주파 도우미 ASPC의 존재도 든든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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